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언덕 위의 구름 (문단 편집) == 논란 ==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이상한 주장이 나돌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일본]]은 [[청나라]]의 위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조선]]을 침탈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계속해서 [[제국주의]]화 되었다'는 요지이다. 그 근원을 추적하면 대개가 이 <언덕 위의 구름>과 연관되어 있다. 이 주장이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청일전쟁]] 이전부터 [[제국주의]]적 야욕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이 개전된 것이 [[1894년]]이고, 그 이전인 1885년부터 참모차장 가와카미가 기밀 수집을 하는 등 개전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그 이전 시기인 1879년에 [[류큐]] 병탄이 일어나고, 1874년에 [[대만]] 침공이 벌어졌다. 그리고 대만 침공에 따라 류큐 합병을 청으로부터 사실상 승인받는다.[* [[대만]] 침공의 명분은 [[오키나와]] 혹은 [[류큐]] 사람이 대만 현지에서 피살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일본은 자국인이 죽은 것으로 보고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즉, 피해자가 [[류큐]] 왕국인, 또는 [[오키나와]] 주민으로 보느냐 여부는 사실상 청이 [[오키나와]] 합병을 인정한 것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일본은 대만에서 철수하는 대신 청 측이 일본측에 배상을 하여 사실상 오키나와는 일본령이 되었음을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1879년의 류큐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병합 직전까지만 해도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에 있었고 1880년에 청나라와 일본은 류큐분할을 서로 제안하기도 했지만 결국 일본이 독단적으로 병합했다. 타이완과 류큐의 병합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시험하고 청일전쟁을 개시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강화도 조약]]의 경우도 [[운요호 사건]]의 배경에서 보여지듯 강제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미 1860년대부터 [[정한론]]이 대두되어 이후 1880년대까지 꾸준히 주장되어 오는 등, [[일본]]의 대륙침략과 [[제국주의]] 기질은 [[청일전쟁]] 전부터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